우리는 ‘지금'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스마트폰 알림은 1초 단위로 우리의 주의를 앗아가고, 기업은 다음 분기 실적에 목을 매며, 정치인은 당장의 지지율에 연연한다. 이처럼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치명적인 질병은 바로 ‘단기주의’일 것이다. '지금’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다. 모든 관심과 자원이 오직 현재라는 찰나의 순간에만 집중될 때, 우리는 과거로부터 얻은 지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우리의 결정이 미래에 어떤 거대한 파급 효과를 낳을지 숙고할 여유를 잃어버린다. 그 결과는 명백하다. 환경 위기, 단기적 성과에만 치중하다 무너지는 기업들,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사회 시스템을 마주하고 있다.
이 거대한 문제의 원인은 개인의 나태함이 아니다. ‘불안함’이 원인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장기적 관점이다. 하지만 시간의 압박으로 인해 눈앞에 결과물이 없을 때 실패자로 낙인 찍힐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관점을 재설계하고 장기적 관점, 즉 ‘롱뷰’ 멀리보는 사고가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인류의 진보를 이끈 위대한 혁신과 찬란한 성장은 모두 이 '롱뷰'의 산물이다. 대성당을 짓기 시작한 석공은 자신이 완성을 보지 못하리란 사실을 알았지만, 수백 년 뒤 후손들이 느낄 경외감을 상상하며 돌을 깎았다. 과학자들은 당장의 쓸모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기초과학에 평생을 바쳤고, 그 덕에 우리는 지금과 같은 기술 문명을 누릴 수 있었다. 롱뷰는 미래에 대한 다양한 시나리오를 탐색하고, 그중 가장 바람직하고 효과적인 경로를 발견한 뒤, 마치 정해진 운명인 것처럼 확신을 갖고 나아가는 능동적인 태도에서 출발된다.
물론 이러한 길은 힘들고 외롭다. 불확실한 미래에 씨앗을 심는 행위는 어리석어 보이고 현재는 괴롭기만 하다. 그렇기에 롱뷰는 필연적으로 ‘독립적 사고'를 요구한다. 남들이 모두 '안된다’라고 말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대중의 압력과 단기적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지적 용기가 필요하다. 이는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깊은 이해와 미래에 대한 치열한 탐구를 바탕으로 한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잘못된 ‘롱뷰’는 오히려 더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으며, 여기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책임’은 달콤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확실한 길을 걷는 이들은 왜일까? 바로 ‘희생’이다.
‘희생’은 일방적인 손해가 아니다. '세대 간의 계약'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기술, 제도, 문화, 그리고 이 지구 환경은 우리 세대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 세대가 우리에게 물려준 선물인 동시에, 우리가 미래 세대로부터 빌려 쓰는 자산이다. 그렇기에 이 자산을 온전히 보존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책임이 있다. 내가 심은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쉬지는 못했지만, 과거 세대가 심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휴식을 취했다. 미래 세대는 내가 심은 나무의 그늘에 앉아 쉴 것이다. 내가 과거 세대가 심은 나무 그늘 아래서 휴식을 취했음을 기억하고, 미래 세대 또한 그럴 수 있도록 나의 역할을 다해야한다.
장기적 사고는 현재를 더욱 의미 있고 풍요롭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100년, 200년 뒤를 상상하기 어렵다면, 당장 내일, 다음 주, 그리고 한 달 뒤의 계획을 세우는 작은 연습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즉흥적인 쾌락을 위해 시간을 소비하는 대신, 어려운 기술을 배우거나, 꾸준히 운동을 하여 미래의 나 자신과 다음 세대를 위할 수 있다.